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외교 (문단 편집) == [[일본 제국]]과의 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나치 독일-일본 제국 관계)] 양국은 추축국의 양대 주력 국가였다. 일제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프랑스]]까지 침공한 것을 계기로 나치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며 추축 동맹을 결성했고, 각각 주변국을 침략하며 대량학살을 비롯한 다양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분명 동맹국이었지만 양국 간에는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일례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화민국]] 역시 독일의 우호국이었으며 독일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오랫동안 저울질하였다.[* 일본 제국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는 독일의 적국인 영국, 프랑스 등과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그만큼이나 미국의 [[경제 대공황]]이 세계에 미친 영향이 어마무시했음을 알 수 있다.] 중화민국은 1920년대부터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의 장교단을 초빙하여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을 조직, 군대를 조련하고 있었고 중독합작이라 불리는 독일과의 군사, 경제 협력을 통해 자국에서 난 텅스텐, 안티몬 등의 전략자원[* 중국의 자원량이 풍부하고 런던 시장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에 유리한 공급처였다.]과 독일제 무기와 기계류를 교환하여 근대화에 들어가고 있었다. 독일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두 나라가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1937년 주중 독일 대사 트라우트만과 주일 독일 대사 디르크젠을 통해 [[트라우트만 공작]]을 진행하여 양국 간의 화평을 중재하려 했지만 일본 제국의 폭주로 물건너가고 결국 1938년 트라우트만 대사와 팔켄하우젠 장군을 비롯한 고문단을 철수시키면서 중화민국과 우호관계를 단절했다. 그리고 일본과 독일의 전체주의 사상은 외견상의 비슷함은 있었지만 맥락면에서 상당히 이질적이었으며 독일-이탈리아와 달리 예전부터 쭉 알고 지내온 관계도 아니었다. 기술에서는 서로 협력하기는 했으나 독일이나 일본이나 둘 다 그 기술을 제대로 못 써먹었다. 제프리 메가기의 <히틀러 최고사령부>에 따르면 독일 육군참모본부에서는 일본의 무기에 대해 단 한 번의 보고서만이 존재했고, 일본은 독일이 설계도를 보내줬음에도 낙후된 기술력으로 복제조차 제대로 못했다. 독일 또한 일본이 건네준 군함 관련 기술을 써먹을 여건이 아니었다. 군사적인 면에서 제대로 된 협력은 거의 전무했으며 오히려 서로의 발목을 잡았다.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이 힘들어지면서 소련과 국경을 접한 일본이 소련의 뒤통수를 쳐서 [[양면전쟁|양면전선]]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으나, 일본은 불과 2달 전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상황이었기에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주만 공습|미국을 공격했다.]][* 중국과 일본을 모두 우호국으로 두어 [[중일전쟁]] 초 양국 간의 화평을 중재하려 했던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스스로를 독일과 소련의 우호국으로 보았기 때문에 [[독소전쟁]] 기간 동안 양국의 화평을 중재하려 했다. 독일과 일본이 가장 많은 대량학살을 저지를 정도로 주적이었던 국가가 각각 소련과 중국임을 생각하면 두 추축국의 궁합은 동맹이 맞나 싶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되자 독일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적국을 하나 더 늘렸다. 독일 또한 일본에 딱히 도움이 된 적이 없다. 결국 이들은 1945년 5월과 8월에 차례로 최후를 맞는다. 일본은 예로부터 독일을 본받아야 할 유럽 선진국으로 생각했지만, 독일인들은 일본인을 [[명예 아리아인]]으로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유럽인들이 그랬듯이 일본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인을 명예 아리아인으로 지정했지만, 나치당원이 길거리서 만난 일본 외교관을 폭행한 것도 그 한 사례이다. 또한 '나치 독일의 일본 프로파간다'라는 책에 따르면, 나치 정권 초기 일본계 독일인들 또한 차별받는 사례가 있었다. 그래도 독일과 일본의 군사동맹을 맺고, 명예 아리아인으로 지정하면서 그 전에 비해 대우가 나아졌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사이가 별로였다는 사실을 쉽게 볼 수 있는 예시가 있다. 바로 [[폴란드 제2공화국]] 문제. [[1939년]] 초부터 [[나치 독일]]이 [[폴란드 제2공화국]]한테 [[단치히]](현 [[그단스크]]) 및 [[실롱스크|상부 슐리지엔]], [[폴란드 회랑]]을 내놓으라고 협박할 때'[[일본 제국]]은 [[폴란드 제2공화국]] 편을 들었다. 또한[[독소 불가침조약]]에 대해서 일본한테 언질을 주지 않는 독일의 [[외교]]술이 공개되자 일본은 독일을 거세게 비난했다. 이 때 일본에서는 진지하게 독일과 군사동맹 관계를 끊을까에 대한 여부도 고민했다.[* 일본의 정치인 내각은 독일을 [[손절]]하는 걸 생각했지만 일본 군부가 이미 정권을 잡은 상황이었고 일본 역시 추축국을 제외하면 딱히 우호국이 없는 신세였기 때문에 결국 독일 손절은 실패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폴란드가 패망하자, 일본은 전쟁이 끝나가는 1944년 초까지 [[폴란드 망명 정부]]를 지원했다. 1944년 중반부터는 일본도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서 폴란드를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는데, 이때부터야 폴란드에 대한 지원이 멈췄다. 그리고 상하이 유대인 문제도 있었는데 1942년 당시 일본군 치하 상하이에서 나치 독일이 [[게슈타포]]를 보내 유대인 거주지를 마련해준 일본군에게 유대인이 유대교회당에 모였을 때 전격적으로 학살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복어계획]]의 영향 때문인지 1937년 이후 상하이 유입 유태인만을 선별하여 지정 장소에 거주하게 하는 격리정책을 썼다.[* 여담으로 아시아의 쉰들러라 불리는 [[스기하라 지우네]]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일본 비자를 받은 유대인 난민 6,000여 명은 무사히 시베리아를 건너 일본을 거쳐 상하이나 미국으로 대피시켰다. 그럼에도 스기하라는 일본 제국 당시 처벌을 받지 않고 괘씸죄가 적용되었는지 전후에 외무성 직원의 정리해고 과정에서 면직되었다.][* 반면 [[하얼빈]]의 러시아인 공동체에서는 일제의 지원을 받은 파시스트 공동체가 하얼빈 내 러시아계 유대인 대상으로 폭력을 일삼았다.[[https://en.m.wikipedia.org/wiki/Russian_Fascist_Party|#]]] [[독소전쟁]] 초기에 소련에서 승승장구하던 시절 [[히틀러]]는 한편으로 [[일본 제국]]이 [[소련]]의 뒷치기를 해주기를 바랐음에도 또 다른 한편으로 독소전에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을 주저했다. 그 이유는 위 문단에서 알 수 있듯 독일과 일본이 [[추축국]]으로 군사동맹 관계였지만 정작 사이가 별로였던 탓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